하나의 콘텐츠 IP가 다양한 장르와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트랜스미디어’는 한국 콘텐츠 산업의 익숙한 제작 공식으로 자리 잡았고, 매해 수많은 작품들이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영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연이어 출격을 알리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원천 IP를 탐색해 온 콘텐츠 업계에서 영화 IP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는지, 변화하는 콘텐츠 소비 방식과 산업 흐름 속에서 살펴봤습니다.
영화가 드라마로, 다시 주목받는 영화 IP
지금까지 영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내에서 트랜스미디어가 활발해지기 전에 등장한 <친구, 우리들의 전설>, <7급 공무원>부터 산업적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의 <엽기적인 그녀>, <뷰티 인사이드>, <왕이 된 남자>까지 영화를 드라마화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웹툰, 웹소설 원작 드라마가 시장을 장악한 2020년대에도, 영화 원작 드라마는 1년에 한 편 찾아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로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디즈니+에서 큰 인기를 얻은 <조각도시>를 필두로 곧 공개를 앞둔 tvN <오싹한 연애>, 넷플릭스 <스캔들> 등 영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잇따라 등장하며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조각도시>는 2017년 영화 <조작된 도시>를 원작으로 한 OTT 시리즈로, 디즈니+ TV쇼 부문 월드와이드 1위까지 오르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영화의 투자배급사 CJ ENM이 초기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고, 원작의 각본을 썼던 오상호 작가가 직접 집필해 독창적 세계관은 유지하면서 새로워진 캐릭터들과 풍성해진 서사로 완성도를 높였죠.
7월 18일 방송을 앞둔 tvN <오싹한 연애>는 2011년 국내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동명의 영화가 원작인데요. 호러와 로코를 결합한 원작 고유의 매력은 살리면서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로 차별화된 오컬트 로맨스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또한 올해 3분기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스캔들> 역시 2003년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로, 시청자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더 깊게’ 파고드는 시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동안 영화의 드라마화가 쉽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러닝타임의 차이에 있습니다.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무비컬'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는데요. 2~3시간짜리 뮤지컬은 영화와 호흡이 비슷해 각색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2시간짜리 영화를 10부작 이상의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창작 과정을 요구합니다.
영화는 한 번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압축형 서사라면, 드라마는 여러 회차에 걸쳐 인물 관계와 갈등, 배경 등 서사를 더 촘촘하게 쌓아 올려야 합니다. 따라서 영화를 드라마화할 때는 원작에 없던 인물과 서브플롯 등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 과정에서 세계관이 넓어지고 감정선이 깊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최근 시청자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숏폼의 유행으로 콘텐츠 소비 속도가 빨라진 흐름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비의 깊이는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요즘 시청자들은 좋아하는 콘텐츠를 한번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서사를 길게 추적하며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합니다. 특히 팬덤이 강한 콘텐츠일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욱 도드라지는데요. 팬들은 파편화된 정보를 스스로 재구성하고, 2차·3차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며 세계관을 능동적으로 확장해 나갑니다. 이처럼 세계관 몰입을 즐기는 시청자들에게, 원작의 핵심은 유지한 채 새로운 서사의 층위를 더해주는 영화 원작 드라마는 매력적인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IP, 트랜스미디어의 새로운 축 될까
이러한 시도가 다시금 힘을 받는 데는 산업적 측면의 변화도 존재합니다. 검증된 웹툰, 웹소설 IP를 둘러싼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며 새로운 원천 IP에 대한 갈증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 콘텐츠 제작 환경이 스튜디오 체제로 전환되면서 영화 IP의 드라마화가 과거보다 유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 할리우드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찍부터 영화가 드라마로 재탄생하며 성공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올해도 마틴 스코세이지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기대작 <케이프 피어>가 지난 5일 애플TV에서 공개됐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을 잇는 <블레이드 러너 2099>도 연내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액션 블록버스터 <분노의 질주>의 TV 시리즈 제작이 발표되며 큰 화제가 됐죠. 미국이 이런 방식에 익숙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거대 스튜디오 체제 아래 IP 권리를 통합 관리하며, 성공한 영화를 드라마로 바로 확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왔습니다.
한국은 과거 영화와 드라마 간 벽이 높았으나, 그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데요. 스튜디오 체제의 안착과 원천 IP의 확보 경쟁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려는 시도도 다각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영화 전성기에 축적되고 검증된 IP의 가치는 웹툰, 웹소설 시대에 오히려 빛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는데요. “모든 스토리 콘텐츠는 플랫폼에 영향을 받는데, 디지털 플랫폼 연재 방식으로 담기 어려운 호흡과 주제의 이야기들이 분명 존재하고, 영화는 오히려 지금 시대에 희소해진 이야기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한 미국처럼 멀티 스튜디오 체제를 갖춘 CJ ENM과 같은 국내 콘텐츠 기업들에게도 ‘IP 자원의 가치 강화’란 측면에서 기회가 더 열리고 있다고 봤는데요. “미디어 간의 융합이 확대된 ‘액체미디어’ 시대에 팬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며 관여도를 높여가는 만큼, IP를 다각도로 확장해 세계관을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은 콘텐츠 기업에게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 덧붙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