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숨기고 위장 잠입하는 언더커버 설정은 한때 범죄물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신분을 감춘 수사관이 조직 내부로 들어가 증거를 모으고, 정체가 발각될 위기의 순간 카타르시스를 터뜨리는 것. 그것이 위장 잠입 서사의 문법이었죠. 하지만 최근의 언더커버물은 달라졌습니다. 범죄 조직뿐 아니라 신입사원, 아파트 주민, 고등학생 등으로 신분을 바꾼 주인공들이 일상 곳곳에 숨어들고 있습니다. 최근 콘텐츠에서 '언더커버' 설정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지, I.Pick이 그 현상을 들여다봤습니다.
🕵️♀️ 잠입의 이유도, 목적지도 달라졌다!
과거의 언더커버가 범죄 조직에 잠입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수사 장치였다면, 최근 작품 속 언더커버는 보다 사적이고 친근한 영역으로 내려왔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스펙트럼이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드라마의 서사 장치였던 위장 잠입이 리얼리티 예능으로 넘어오고, 작품 속 위장 신분과 목적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증권감독관이 금융비리를 캐기 위해 증권사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는 <언더커버 미쓰홍>이나 국정원 요원이 고종 황제의 금괴를 찾기 위해 고등학생으로 잠입하는 <언더커버 하이스쿨>처럼 타이틀에 '언더커버'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잇따라 등장하며 인기를 얻었는데요. 심지어 이 장치를 현실로 가져온 예능 <언더커버 셰프>에서는 스타 셰프들이 주방 막내로 위장 취업하기도 하죠. 여기에 장기수선충당금을 손에 넣기 위해 평범한 입주민으로 신분을 감추는 <아파트>까지 잠입의 무대는 한층 넓어졌습니다. 또한 10월 공개를 앞둔 <100일의 거짓말>에서는 경성 최고의 소매치기가 독립군과의 거래를 통해 조선총독부 통역생으로 신분을 바꿔 밀정으로 잠입하는데요. 독립군이 직접 심은 밀정이라는 새로운 설정이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이어 <나의 유죄인간>에서는 특수부대 출신 형사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재벌 3세의 남장 수행비서로 잠입하며, 로맨스와 브로맨스를 넘나드는 스릴 로맨스를 예고했습니다.
이처럼 범죄물의 클리셰였던 언더커버 설정이 시대극, 로맨스, 미스터리 코미디, 오피스물 등으로 확장됐는데요.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이 되어 낯선 세계에 들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하나의 매력적인 흥행 문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왜 우리는 '가짜 신분'에 열광할까
언더커버 서사의 대중적 흥행 뒤에는 현대 사회의 심리와 라이프스타일도 깊게 관여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은 하나의 모습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프로페셔널한 직업적 페르소나를 만들고, 온라인에서는 또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SNS에서는 부계정을 여러 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죠. 이른바 '멀티 페르소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본래 신분을 감추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언더커버 주인공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합니다. 현실에서는 쉽게 바꿀 수 없는 직업과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 '가짜'로 시작해, '진짜'를 찾다!
그런데 언더커버 서사의 매력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가짜'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견되는 '진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도, 직업도, 목적도 숨긴 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시청자는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는 '진정성'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SNS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고, AI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꾸며지지 않은 관계와 진짜 감정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언더커버 서사는 이 욕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입니다. 가짜 신분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짜 감정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거짓말 속에서 오히려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 정체를 숨기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의 본질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되는 셈입니다.
결국 언더커버 서사의 핵심은 단순히 '들키지 않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짜 나를 발견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언더커버 서사에 끌리는 이유가 바로 이 역설 때문 아닐까요?!